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신 영웅전] 맹손의 자식 교육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노(魯)나라에 맹손(孟孫)이라는 세도가(勢道家)가 살고 있었다. 맹손은 사냥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집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진서파가 새끼 사슴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어미 사슴이 슬피 울며 따라왔다. 그 눈빛에 자식을 돌려 달라는 소망이 그토록 간절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착한 그는 어미 사슴의 모정에 감동해 새끼를 풀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진서파가 집으로 돌아오자 맹손은 잡은 사슴을 가져오라 했다. 진서파는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고 어미 사슴의 슬픔을 뿌리칠 수 없어 새끼를 돌려보냈노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맹손은 크게 화를 내면서 그를 쫓아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석 달이 지나 맹손은 진서파를 다시 불러들여 자기 아들의 가정 교사로 삼았다.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맹손의 마부(馬夫)가 “지난날에는 진서파에게 죄를 물어 몰아냈다가 이제는 그를 불러 아드님의 스승으로 삼으시니 그 연유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맹손이 “진서파가 사슴의 새끼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면 항차 내 아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한비자』, 『여씨춘추』)   누구인들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찌 내 자식만 소중하겠는가. 학교 폭력으로 자살한 아이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살한 담임 선생님도 누군가의 자식이며, 가슴 아파할 엄마와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죽어야 하나. 나 자신을 포함해 모두 부모 잘못이며, 그 잘못의 뿌리에는 무지가 있다.   퇴계(退溪) 선생은 사랑(仁)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情)이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이치(端)라고 했다.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진 이래 아버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모두가 내 탓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자식 교육 자식 교육 누구인들 자식 새끼 사슴

2024-09-29

[신복룡의 신 영웅전] 공자의 자식 교육

진항(陳亢)은 공자(孔子)의 제자였다. 그는 공자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혹시 아버님에게서 남다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에 백어는 “그런 일은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공자가 혼자 뜰에 있을 적에 백어가 허리를 굽히고 빨리 지나가니 “너는 시(詩)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백어가 “배우지 못했다”고 아뢰자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날 또 공자가 뜰에 있을 적에 백어가 허리를 굽히고 그 앞을 지나가려니 “너는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었다. 백어가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아뢰었더니 공자는 “사람이 예를 배우지 못하면 바로 서지 못한다”고 말했다. 백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진항은 기뻐하며 말했다.   “세 가지를 알았다. 시에 관해 들었고, 예에 관해 들었고, 군자는 자기의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자가 뜰을 거닐며 자식을 가르쳤다 해서 이 고사는 ‘정훈(庭訓)’이라 한다. (『논어』 계씨편)   군자는 자기 자식에게 성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빗나가는 이유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성화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 고향을 떠나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니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는데 아버지는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잠결에 아버지가 내 몸을 쓰다듬으며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컸어.”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이 잘 때 사랑하셨다. 그것이 내가 느낀 부정(父情)의 전부다.   지금 한국사회는 학교 교육이 무너졌다. 가정도 무너졌고, 아버지가 실종됐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자식은 잠들었을 때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씀을 한 번도 못 들은 것이 가슴에 맺힌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공자 자식 자식 교육 백어가 아버지 백어가 허리

2023-11-26

[수필] “아저씨! 담뱃불 좀 부칩시다”

한국에서 사십 대 초반 때 일이다.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간단한 회식이 있었다. 이럴 때는 으레 술도 마시게 된다. 나도 소주 서너 잔을 마셨다. 음주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기에, 택시로 귀가하기로 마음 먹고 담배를 피우며 발길을 택시 정류장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거의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두 청소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아저씨! 담뱃불 좀 부칩시다.” 어투가 조금은 건방졌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욱’하고 참지 못하는 기질이 발동했다. “뭐야? 너는 아버지도 없냐?” 나는 그 애의 멱살을 움켜쥐고 뺨을 한 대 때렸다. 불의에 일격을 당한 녀석은 조금은 겁먹은 듯 말투는 다소 공손해졌다. “왜 때려요? 파출소 가요!” “뭐? 파출소 그래 잘됐다. 따라와” 나는 그 애의 허리띠를 부여잡고 앞장섰다.     파출소는 회사 근처에 있어 금방 도착했다. 그 애는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엄마라는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나도 안 때려 본 자식을 네가 뭔데 손찌검이야? 경찰 아저씨! 저 사람 처벌해 주세요." 그녀는 내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진술 과정에서 그 애들이 Y공고 2학년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때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못하면 죄인이 된 심정으로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 했습니다. 제 자식을 혼내서 사람 만들어 주세요" 라며 자식의 머리를 쥐어박지 않았던가?   그녀는 내가 조서를 받기 위해 경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자식을 데리고 나갔다. 파출소장이 "선생님! 제 직권으로 훈방 조치해 드리고 싶지만, 피해자 부모가 ‘처벌을 원한다’고 진술했기에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라며 미안해했다. 자정이 다 되어 나는 순찰차에 태워져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넥타이와 혁대를 풀어 놓고 난생처음 철창에 갇혔다. 유치장은 을씨년스러웠고 냉기 때문에 추위가 엄습해 왔다. 사복 착용의 담당 경찰관이 내 조서를 읽어보고는 혀를 차며 "세상 참 이상하게 변해가네"라며 한탄했다. 그는 "담배 피우고 싶으시죠? 여기는 금연구역이니, 감시카메라가 선생님 쪽을 비추면 고개를 저쪽으로 돌려 연기를 내 뿜으세요"라며 자신의 담뱃갑을 통째로 건네주었다.     억울한 마음인지 추위 때문인지 바들바들 떨다가 새벽 5시쯤 문래동 ‘즉결재판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는 관내 파출소로부터 집결된 피의자들이 50여명 넘게 있었다.   오전 8시가 조금 지나자 법복을 입은 여자 판사가 입정했다. 고성방가, 무전취식, 미풍양속 저해, 폭력, 노점상 단속 등의 죄질에 따라 구류 29일 미만으로 판사가 처벌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다음은 이진용 선생님!" 어찌 된 영문인지 판사는 나를 ‘선생님’으로 깍듯이 호칭하고 있었다. "선생님! 참 잘하셨습니다. 이 선생님 같은 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을 행사하신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나는 "예, 잘못했습니다" 짧게 답했다. "벌금 일만원에 처합니다. 수중에 만 원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제가 빌려 드리겠습니다." 카랑카랑한 판사의 음성이 법정을 울려 퍼졌다. 일순간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나는 벌금형에 처해졌고 납부처에 벌금을 내고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 법원을 나설 수 있었다.   철창에 몇 시간 갇혀 있으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루도 안 되는 구금 상태에 있었지만 마치 몇 년 갇혀 있다가 풀려 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다. 이번 기회에 담배를 아예 끊어 버리자." 나는 굳은 결심으로 반 정도 남은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 날 아침 날씨는 유난히 밝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늦은 출근길에 나섰다.   언젠가 저명인사들의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서 ‘맞담배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적인 정서로는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윗사람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는 것이 올바른 예절이라고 했다.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런 상황이 또다시 닥치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못 본 척 지나쳐야 하는가?     아무튼 그 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담배를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 결국, 그 사건이 나에겐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아저씨 담뱃불 경찰 아저씨 자식 교육 이진용 선생님

2023-04-2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